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콜라이 2세 (문단 편집) ==== 외교정책 및 러일전쟁 ==== 니콜라이 2세의 외교정책은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를 그대로 따라갔다. 원래 [[나폴레옹 전쟁]] 이래 러시아는 [[프로이센 왕국]]과 우호적이었으나, [[독일 통일]] 이후 현상유지를 선호한 [[독일 제국]] 초대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세계 정책|팽창주의]]를 추구하는 [[빌헬름 2세]]에 의해 실각하면서 파탄난다. 비스마르크의 후임인 [[레오 폰 카프리비]]는 러시아와의 동맹을 파기했다. 러시아는 세력균형을 위해 독일과 앙숙이었던 [[러불동맹|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이후 [[영러협상|영국도 참가시켜]] [[3국 협상]]이 이루어진다. [[독일 제국]]의 팽창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프랑스 동맹을 강화하고, 현상유지의 평화를 추구한다는 입장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리하여 본인 주도로 [[만국평화회의|헤이그 평화 회의]]를 개최하였고, 이것은 1899년 1907년 두 번 열렸다. 이런 종류의 국제회의로는 최초로 열린 것이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이후 [[국제연맹]] LON도 마찬가지이다. LON은 League Of Nations의 줄임말이다.] 이렇게 현상유지를 선호했으면서도, 그와는 모순적으로 아버지가 지지한 [[범슬라브주의]]를 마찬가지로 지지하여 발칸 반도의 슬라브족 민족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벗어나는 것을 지원하고, 이곳의 슬라브족 국가인 [[세르비아 왕국]]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 이런 모순적 외교 정책은 이후 [[1차대전]]의 직접적 원인이 된다. 즉, 황태자 암살 책임이 있는 세르비아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정벌하려고 하자,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보호하기 위해 총동원령을 발동했고, 이것이 독일의 대러시아 선전포고를 불러와 세계대전이 터진 것이다. 러시아는 유럽에서는 현상유지를 선호했지만 극동에서는 팽창주의를 추구했다. 러시아는 계속 빈사상태였던 청나라 영토를 먹어들어갔다. 그리하여 만주에는 러시아 주도로 철도가 건설되었으며, 이미 1895년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러시아가 관심있는 [[요동 반도]]를 먹으려는 것을 좌절시킨 바 있었다. 니콜라이 본인 이야기로는 조선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으나, 일본이 조선을 점령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다고 언명하기도 했다. 이런 갈등 탓에 일본과 전쟁이 일어났다.[* 니콜라이 본인은 저렇게 말했지만 행적들을 본다면 그는 조선을 많이 도와준 편이다.] [[러시아 제국군]]과 [[일본군]]은 만주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반복했으나 아래의 국내문제로 인해 전쟁은 러시아에 불리하게 마무리되었고, [[발트 함대]]가 [[대한해협]]에서 전멸하자 미국의 중재로 맺은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시아는 한반도와 남만주에서 손을 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